우리가 성장함에 따라 얼굴이 조금씩 달라지 듯이 다음도 여러분과 함께 성장하면서 그 동안 수 차례 얼굴(초기화면)을 가꾸어 왔습니다. 최근 네이버, 네이트들이 초기화면을 전면 개편하면서 포털 초기화면의 변천사가 다시 화제에 올랐는데요. 오늘은, 다음이 포털로 본격 변신하여 현재의 틀을 갖추게 된 2000년까지 초기화면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럼 함께 가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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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인터넷상의 예술공간 '버추얼 갤러리'
▲ 1996년 : Virtual Gallery, Cezanne
1995년 문을 연 다음은 지금과 같은 포털 사이트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제공되던 서비스는 예술 작가들의 사진과 회화 등을 전시하는 버추얼 갤러리가 고작이었습니다. 하루 방문객은 고작 1만여 명 정도. 그나마도 방문객의 절반 이상은 외국인이었습니다. 다음이 이런 버추얼 갤러리 형태로 서비스를 시작하게 된 것은 그 배경이 있습니다.
다음커뮤니케이션은, 영동고등학교 동창생인 예술 분야에 대해서는 무지하지만 관심은 많던 이재웅님과 컴퓨터에 대해서는 지독한 ‘컴맹’이고 인터넷은 완전초보인 故박건희님이 1993년 파리에서 운명적으로 재회하면서 본격적으로 구상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이재웅님은 프랑스 ENS에서 ‘인지과학’ 박사과정을 밟으러 유학길을 떠났었고, 故박건희님은 프랑스 에꼴 드 보자르에 스페셜 아뜨리에 과정을 밟기 위해 프랑스에 왔었죠.
이 때, 두 분은 노틀담 성당 옆 故박건희님의 작업실과 몽빠르나스 근처 이재웅님의 자취방을 오가며 결심을 하게 됩니다. 각자의 전문 분야인 예술과 인터넷을 접목한 사이트를 만들기로 한 것이죠. 그 결과, 94년 12월 24일. 이재웅님과 故박건희님은 다니던 학교에 달랑 편지만 남겨놓고 무작정 귀국해버렸다고요. 그 후 1995년 4월 24일 본격적으로 서비스를 시작, 처음으로 ‘박건희 Image, Image展’ (당시URL: www.cezanne.daum.co.kr)을 열었습니다.
▲ 1995.4.29 한국일보
한 인터뷰에 따르면 故박건희 님은 “인터넷은 시공을 초월한 작품교류는 물론이고 문화예술의 공감대 형성을 위한 최상의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고, 이재웅님 역시 “기술과 예술이 만나 문화공간을 가장 적절히 표현, 다수의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을 찾았죠. 웹의 응용분야로 가장 적합한 것이 가상 갤러리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라고 창립 의도를 설명했습니다.
이 것이 바로, 버추얼 갤러리의 탄생 배경입니다. 이 후 버추얼 갤러리는 광주 비엔날레 전시회를 인터넷으로 생중계하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지금의 동영상 생중계가 아니라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을 찍은뒤 데이터를 웹에 올리는 형태였지만,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시도로 많은 관심을 받게 됐습니다. 그 결과, 다음은 국내 최초로 미국 포인트 커뮤니케이션사가 선정하는 세계 우수 웹사이트 5%안에 추천됐고, 10월에는 나우콤 웹사이트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타기도 했습니다.
◈ 1997년, 영화 잡지를 영화 웹진으로 최초 변신시킨 'Cy.nema'
▲ 1997년 : Cy.nema
Cy.nema (사이네마) 서비스는 영화 잡지의 틀을 넘어 영화 웹사이트의 새 형태를 만들고자 했던 시도였습니다. 이 때만해도 브로드밴드가 대중화되기 전이라 성공을 점치기 어려운 프로젝트였지만, 깐느 영화제를 인터넷으로 직접 중계한 시도나 네티즌 영화평론가, 영화 평점 직접 매기기 등의 새로운 시도들을 많이 선 보인 서비스였습니다. 현재 영화서비스에서도 적용되고 있는 부분인 걸 보면 굉장히 빠른 시도였죠. 영화전문잡지 키노가 공동으로 운영하며 키노의 기사들도 함께 볼 수 있도록 했었습니다.
깐느 영화제 인터넷 중계 때에는 현지에 직접 특파원을 파견하여 매일매일의 새로운 소식과 영화리뷰, 감독 및 배우와의 인터뷰, 프로필, 영화제 동향, 그리고 재미있는 이야기거리들을 한국어로 인터넷 생중계했었습니다. 이를 통해 국내 네티즌들은 영화제가 끝난 후에야 접할 수 있었던 정보들을 인터넷의 멀티미디어적 요소와 함께 가장 빠르고 생생하게 접할 수 있으며, 매일매일 업데이트된 현지의 영상들을 보다 생동감있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블로거기자단들이 뉴스보다 빠른 정보를 전하고 있는 점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여기서 특이한 점은 눈에 확 띄는데요, 발견하셨나요? 당시 네이버의 검색 엔진을 사용했다는 사실이죠 ^^;
◈ 1997년 10월, 청소년을 위한 웹진 'Ch.10' 창간
▲ 1997년 10월, Ch.10
다음이 현재 청소년들을 위한 사회공헌 활동을 많이 하는 거 아시죠? 청소년들을 지원하는 것은 1997년부터 시작되었나봅니다. 1997년 5월에 다음은 국내 최초로 청소년들을 위한 웹진, "Ch.10(채널텐)(http://www.ch10.com)을 창간해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채널텐의 특징으로는 청소년들이 자발적,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만들어갈 수 있는 공개사이트의 성격을 띄고 있는 점과 청소년들의 욕구를 만족시킬만한 다양한 내용을 담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특정 주제구성을 위해 청소년 프로젝트 팀, 청소년 기획, 자문팀이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현재 '참여와 공유' 철학이 떠오르지 않으시나요?
채널텐의 주요 메뉴로는 영화, 게임, 가요, 문화 등을 비평해보고 자신의 느낌, 생각을 표현하는 "도마", 십대들이 보는 세상과 세상이 보는 십대 그리고 십대와 다른세대와의 만남을 통해 마음속의 얘기를 털어 놓는 "응시", 다가올 시대의 변화를 예감해보고 십대들의 살아 움직이는 단어를 가늠해보며 자신의 몽상을 표현해 보는 "몽상 Lab", 학교 안팎, 지구촌 곳곳에 있는 10대들의 살아가는 얘기를 전하는 "현장중계", 다양한 질문과 의견을 개진하고 낙서를 할 수 있는 "선수 입장", 기획이나 이벤트 등을 담은 "Ch.S"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 1998년 12월, 다음 '한메일넷'이라는 이름으로 포털 서비스 시작
▲ 1998년 12월, 한메일넷
다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게된 계기는 바로, 한메일이었습니다. 1997년 5월 서비스를 시작한 한메일넷은 1년 반만에 국내 인터넷 메일서비스 업체로는 처음으로 100만 회원을 돌파했습니다. 그리고, 100만 회원을 돌파한 1998년 12월 10일 다음은 검색엔진도입과 전자상거래부문 활성화를 중심으로 하는 新한메일넷 개편을 전격 발표했습니다.
1998년 당시 인터넷업계의 이슈가 되어온 인터넷 사용자들이 굳이 특정한 서비스를 위해 다른 사이트를 방문하지 않아도 한사이트안에서 모든 정보 및 서비스를 이용가능하게 만들어 놓은 인터넷서비스의 새로운 조류인, 포털사이트라는 흐름에 발맞추게 된 것입니다. 새로운 조류인 포털사이트라는 말... 지금 들으면 참 재밌죠? 이 개편 때, 정보검색사이트인 삼성 SDS의 네이버 와 전략적제휴를 맺고 한메일넷 홈페이지에 검색서비스를 시작했고, 한메일넷쇼핑몰에서 인터파크와 기반기술 및 결제관련 기술에서 상호제휴하기로 양사가 합의하는 것을 우선 골자로 발표했었습니다. 네이버와 인터파크라.... ^^;
번외로, 1998년 당시 국내 인터넷 이용자를 400만명으로 추산할 때 4명중 1명이 한메일넷 회원이었습니다. 한메일넷은 국내에서 가장 많은 네티즌들이 모이는 인터넷 사이트였죠.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당시만 해도 100만명 이상의 회원을 가진 전자우편 서비스 회사는 전세계를 통틀어도 7개에 불과했다는 점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 때, 20만명이 넘는 스페인 사람들도 한메일넷을 쓰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들이 이용하는 것은 한메일넷과 제휴한 스페인 회사의 무료 전자우편 서비스인 ‘믹스메일’이었지만, 이들은 실질적으로 사용하는 메일이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한국땅을 거쳐 오가는지 몰랐겠죠.
◈ 1999년, 다양한 소리를 담은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의 장으로 변신
1999년 7월, 다음은 '한메일넷'에서 '다음'으로 브랜드명을 변경하고 본격적으로 포털 서비스를 시작하게 됩니다. 이 당시 다음은 국내 최대 회원을 보유한 ‘한메일넷’의 폭발적인 인기 여세를 몰아 무료 이메일서비스뿐만 아니라 커뮤니티 서비스인 '다음 카페'. '마이칼럼', '미즈넷', 다음쇼핑 등 다양한 서비스를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완벽한 원-스탑 포털(One-Stop Portal)서비스인 ‘다음’을 새롭게 탄생시켰습니다.
당시 대표를 맡고 계시던 이재웅님은 “인터넷이 또하나의 미디어로 부상하고 생활화되면서, ‘포털’은 곧 ‘문화’로 정착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국서비스에 잠식될 위기에 놓인 국내 인터넷 현실에서 좀더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했고, 모든 서비스를 포괄한 만한 이름인 미래와 조화로운 목소리를 함축하는 ‘다음’으로 포털서비스명을 탄생시켰습니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번외로, 이 때 국내 최대의 전자우편 서비스인 ‘한메일넷’과 최대 커뮤니티서비스인 ‘다음카페’ 회원수는 얼마나 됐을까요? 한메일 가입자는 260만명, 다음 카페 가입자는 10만명이었네요. 현재의 3800만명과 비교하면 @@, 그리고 이 당시 카페 개설수는 7,000개. 지금은 무려 740만개나 되죠.
◈ 2000년, 현재의 로고로 변경
▲ 2000년 1월, Daum
다음은 2000년 1월 10일, 새로운 다음 로고를 반영한 초기화면을 선보였습니다. (다음2.0버전으로 불리웠습니다. 웹2.0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면서, 2.0등의 개념이 지금은 흔해졌지만, 당시로서는 새로웠죠) 바로 현재의 그 로고입니다. 다음인이라면 모두 알고 계시겠지만, 다음 로고는 노란색 D, 오렌지색 a, 연두색 u, 하늘색 m의 네글자가 서로 맞물려 모두 7가지 색깔로 이루어졌으며, 네티즌들의 다양한 목소리(多音)가 서로 겹쳐져서 네트워킹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상징하는 것으로 인터넷에 대한 Daum 의 미래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지리상으로는 서로 떨어져 있어도 네트워크 상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다양한 색깔의 개성을 나타내고 이를 통해 또다른 모습들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하네요.
다음은 당시 50여종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는데, 다양한 서비스를 한 눈에 찾을 수 있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이와 같은 화면으로 개편했다고 합니다. 특히,기존의 한메일넷(E-메일)과 다음쇼핑(전자상거래)을 비롯해 이번주 오픈하는 마이다음(개인화서비스)을 주축으로 구성했다고요.
'마이다음'은 자신에게 온 이메일 수신, 자신이 가입되어 있는 동호회나 컬럼에 새로 올라온 소식이나 글, 자신이 항상 즐겨찾는 컨텐츠(금융,증권, 운세, 뉴스, 건강등)를 자신만을 위한 페이지로 구성해 놓고 여기저기를 서핑할 필요없이 자신이 원하는 서비스를 자신의 프로파일에 맞게 한눈에 이용할 수 있는 개인화서비스로 위 이미지에서 보면, 굉장히 비중있게 다뤄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소개해드린 다음 초기화면의 변천사, 어떠셨나요?
2000년 이 후 초기화면이 변해온 모습들은 내일 이어서 전해드릴게요. 기대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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